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레이쇼 넬슨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619px-Young_Nelson.jpg|width=100%]]}}} || || HMS 로웨스토프에서 근무할 당시 그려진 초상화.[br]그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던 [[상관]] 윌리엄 로커를 위해 그려진 것이다. || [[1758년]] 11명의 [[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난 넬슨은 [[1770년]] 12세에 해군에 [[입대]]했다. 외삼촌이 함장으로 있는 HMS 레조너블(Raisonnable) 함의 조타수로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관후보생]]이 되었다. 다만, 뱃사람이면서도 해군생활 내내 배멀미로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 배멀미는 오랜시간 배를 타도 적응되는 감각이 아니라서 그렇다. 실제로 해군복무를 하게되면 함상생활을 이,삼십년 가까이 했음에도 배멀미로 고통받는 부사관이나 장교를 흔히 볼 수 있다. 병들이야 함상생활을 6개월만 하면 육상근무로 전환해 전역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지만 함상생활에 생계가 달린 부사관이나 장교는 계속 참고 근무하는 수 밖엔없다.] [[1780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그 뒤에는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프랑스 혁명정부의 [[함대]]와 싸우는 데 앞장섰다. [[1794년]]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 섬]]을 점령했으나, 이때 오른쪽 눈을 잃는 첫 부상을 당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John_Jervis,_Earl_of_St_Vincent_by_Francis_Cotes.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urrender_of_the_San_Nicolas_at_St_Vincent.jpg|width=100%]]}}} || || 세인트 빈센트 백작 존 저비스 경.[* John Jervis, 1st Earl of St.Vincent][br]넬슨은 [[세인트빈센트 곶 해전(1797)|세인트 빈센트 해전]] 당시 저비스 휘하에서 복무하며 큰 전공을 세웠다. 저비스는 평생 동안 넬슨에게 좋은 상관이자 스승으로 남았다. ||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에서 산 니콜라스 함의 항복을 접수하는 넬슨.[* 넬슨이 적함 장교로부터 칼을 건네받고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유럽 해전에서의 항복 의례였다. 해전뿐망 아니라 육전에서도 항복 의례가 지휘관의 칼을 넘겨주는것이었다.] || [[1797년]]에는 존 저비스 제독 휘하에 들어갔고 [[스페인 해군]]을 상대로 벌어진 [[세인트빈센트 곶 해전(1797)|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당시 영국 함대는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는데[* 영국 함대의 전력은 [[전열함]] 15척, [[프리깃]] 5척이었고 스페인 함대의 전력은 [[전열함]] 24척, [[프리깃]] 7척이었다. 다만 스페인 함대는 뭉치지 않고 2개의 함대로 분산되어 있었다.] 넬슨이 저비스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함선인 캡틴 함[* 이 당시 영국 함대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74문 3등급 전열함이다.]을 변침시켜 스페인 함대의 집결을 저지한 덕택에 영국 함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넬슨은 직접 함상 전투에 뛰어들어 스페인 함대의 산 니콜라스 함[* 80문 3급 전열함.]와 산 호세 함[* '''112문 1급 전열함.''']을 나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넬슨의 행동은 엄연한 [[항명]]이었지만 넬슨의 항명 덕분에 승리했으므로 아무도 넬슨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 직후 넬슨을 만난 저비스는 그를 힘껏 안아줬으며 항명을 지적하는 보좌관에게서 넬슨을 두둔해주었다고한다. 같은 해 4월 넬슨은 영국 해군에서 9번째로 높은 청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Blue)직에 올랐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ir_Horatio_Nelson_when_wounded_at_Teneriffe.jpg|width=100%]]}}} || || 테네리페 전투에서 오른팔을 잃는 넬슨. ||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넬슨은 두 번째 부상을 당한다. 넬슨은 테세우스 함을 배정받아 스페인 테네리페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적탄에 맞아 오른팔에 복합 골절상을 입었는데 문제는 이를 제대로 치료할수가 없었다.[* 오늘날 골절상은 [[수술]]을 통해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그런 수술 [[개념]]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골절상을 당하면 치료할수 있는 방법이 부목으로 자연 치유가 되지 않는한 없어서 되지않을 경우 썩어가기에 무조건 그 부위를 절단하는 수밖에 없었고 [[마취]]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영어 관용구 중에 'Bite the bullet(입에 총알을 물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당시 골절로 인해 절단 수술을 할 때 '''마취 없이''' 총알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 모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근데 문제는 저 시대 총탄은 통짜 납덩어리였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이 [[건강]]에 좋을리가 없었다. 그만큼 이 당시의 절단 수술은 위험하고 또 고통스러웠으며 심지어 수술 후 과다출혈이나 쇼크로 사망하는 [[사람]]도 비일비재했다. 넬슨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넬슨의 경우는 아니지만,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에 그런 수술이 잘 묘사되어 있다.] 결국 넬슨은 오른팔을 절단해야 했고 5달 가까이 임무를 쉬어야 했다. 결국 넬슨 스스로도 오른쪽 눈을 잃은것에 이어 오른팔까지 잃은 것에 꽤나 절망한 모양인지 노트에 '나는 이제 끝났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을 정도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elson_at_the_Battle_of_the_Nile.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vanguard box [header].jpg|width=100%]]}}} || ||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기함 오리앙 함의 폭발을 목격하는 넬슨.[* 그림에서 넬슨이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는데 이는 전투 중 적탄을 이마에 맞아 피부가 벗겨지는 부상을 당해서 그렇다. 하지만 비교적 작은 부상이었으므로 붕대를 감고 곧바로 다시 전투를 지휘했다.] ||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넬슨이 탑승했던 기함 HMS 뱅가드 || 그러나 넬슨은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여 [[이집트 원정]]을 떠난 [[나폴레옹]]을 섬멸하는 임무를 맡는다. 비록 나폴레옹을 붙잡지는 못했지만 넬슨은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전멸당하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었고 프랑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이집트 원정]]은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소수의 측근들만 데리고 탈출하는 굴욕을 당한다.] 이 전공으로 넬슨은 나일의 남작(Baron Nelson of the Nile)[* 사실 이 호칭은 넬슨의 전과에 비하면 약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당시 [[영국 정부]]의 방침이 [[총사령관]]이 아닌 [[인물]]은 남작보다 높은 작위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하여서 넬슨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고 [[정부]]에 이렇다할 연줄도 없었다. 그러니 당시 상황에서는 영국 정부가 넬슨에게 가능한한 최고의 영예를 베풀어주기는 한 것.]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며 군 경력의 정점을 찍는다. 이후 넬슨은 [[나폴리]]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나폴리 국왕이 하사한 브론테 공작 작위를 받았고 또한 [[영국 정부]]로부터 해군 서열 7위인 적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Red), 해군 서열 6위인 청색 중장(Vice Admiral of the Blue)직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024px-Nicholas_Pocock_-_The_Battle_of_Copenhagen,_2_April_1801.jpg|width=100%]]}}} || || [[영국]]-[[덴마크-노르웨이 왕국|덴마크]] 사이에 벌어진 코펜하겐 해전(1801). 영국 해군은 이 전투를 통해 덴마크가 '''[[대영제국|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해전 이후 덴마크는 오히려 영국에 대한 반감만 커지다가 결국 나폴레옹의 편에 붙는 [[나비효과]]가 되어버렸다.][* 참고로 안데르센이 쓴 [[홀거 단스케(동화)]]에도 언급되는 전투다. 문서 참조.] || [[1800년]]에서 [[1801년]]에 걸쳐 영국의 [[몰타]] 점령 문제를 계기로 두 번째 무장 중립 동맹[* 첫 번째 무장 중립 동맹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을 견제하고자 결성되었다.]이 결성되었다. 참가국은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이었는데 문제는 러시아였다. 이 당시 영국은 [[발트해]]를 통해 [[동유럽]]으로부터 곡물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변덕스러운 러시아의 [[차르]] [[파벨 1세]]가 영국 선박들이 발트해를 통과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덴마크도 러시아에 동조했다. [[영국 정부]]는 하이드 파커 경이 지휘하는 함대[* 전열함 12척, 프리깃 5척 규모였다.]를 덴마크로 보내 무력 시위를 하도록 했다.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함대는 영국 함대와 비교하면 수도 적고 훈련도도 낮았지만 해안 포대의 엄호를 받고 있어서 손을 쓰기가 까다로웠다. 때문에 전투는 치열한 포격전으로 점철되었다. 한편 넬슨은 이번 작전에서 엄청나게 애를 먹고 있었다. 지휘관인 파커 경은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돌적이고 모험을 좋아하는 넬슨과는 상성이 최악이었다. 넬슨이 보기에 공격을 조금만 지속하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파커 경은 깃발 신호를 보내 넬슨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파커 경이 깃발 신호로 퇴각을 재촉하자 참다 못한 넬슨은 실명한 눈에 [[망원경]]을 갖다 대고 부관에게 말했다. > ''''(깃발)신호가 보이지 않는구만.'''' 치열한 전투 끝에 덴마크는 영국에게 굴복했고 무장 중립 동맹은 깨졌다. 덴마크는 이 전투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고 러시아의 [[파벨 1세|차르]]는 시해당했다. 결과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넬슨은 코펜하겐 해전의 승리로 [[자작(작위)|자작]]에 서임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영국 본토를 침공할 대규모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불로뉴]] 항에 상륙정들을 집합시키게 했다. 기겁한 영국 정부는 넬슨을 파견해 불로뉴 항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고 넬슨은 저돌적인 성격답게 불로뉴 항의 프랑스 함선들을 탈취할 작전을 내놓았다. 하지만 넬슨의 작전은 실패했고 영국 함대는 물러나 프랑스 [[항구]]들에 대한 봉쇄에만 주력했다. 불로뉴 항 공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과 프랑스는 숨고르기 목적으로 [[1802년]] [[3월 25일]]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한다. 두 [[국가]] 사이의 충돌이 잠시 완화되자 넬슨은 본국으로 돌아가 [[여행]]을 즐겼고 요양차 [[버밍엄]]에 머물렀다. 하지만 [[아미앵 조약]]은 [[1803년]] [[5월 18일]]을 기해서 무효화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전쟁에 돌입한다. 넬슨은 새로운 기함으로 빅토리 함[* 새로 건조한 것이 아니고 퇴역하다시피 한 함선을 전면 수리해서 재취역시킨 것이다. 다만 감안해야 하는 것이 빅토리 함은 원래부터 잘 뽑힌 축에 속했고, 당시에는 목조 범선 특성상 같은 설계로 만들어도 같은 성능이 나온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은 배는 수리를 해서라도 계속 쓰는 것을 선호했다.]를 받았고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중장(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에 올라 프랑스의 지중해 항구인 툴롱의 봉쇄 임무를 수행한다.[* 이 당시 영국 해군은 함대를 동원해 프랑스의 항구들을 모조리 봉쇄함으로써 프랑스 함대가 한 곳으로 뭉치는 것을 막았다. 아무리 프랑스 함대의 수준이 허접이라고 해도 일단 뭉치면 위협적인 전력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 해군은 규모면에서 매우 거대했으나 그만큼 [[서인도제도|지킬]] [[식민지|영역]]이 많았고 함대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함대에 봉쇄당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럽에 함대 전력을 집중시킬 여력이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67912.jpg|width=100%]]}}} || ||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상대한 [[피에르 빌뇌브]] 제독. || 아미앵 조약이 무산되자 프랑스는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 불로뉴에 전력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고 병력 수송 함대를 호위할 인물로 빌뇌브 제독을 선택한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에게 봉쇄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전략적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영국 함대의 봉쇄망은 가히 난공불락이라 할만했다. 저비스 제독은 1801년 영국 해군성에 보낸 편지에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프랑스군이 영국 본토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데요, '''다만 걔네들이 바다를 통해서 오지는 못한다고 말씀드릴 뿐입니다.'''']]라고 썼다.] 이런 상황에서 전공에 목말랐던 넬슨이 대형 사고를 저지른다. 넬슨은 자신이 맡고 있던 툴롱의 봉쇄망을 느슨하게 해 프랑스 함대를 유인하는 계책을 썼는데 이게 잘못되어 툴롱을 빠져나온 프랑스 함대를 아예 놓쳐버린 것. 당황한 넬슨은 급히 프랑스 함대를 뒤쫓았으나 결국 붙잡지 못했고 책임을 지기 위해 함대를 반납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영국 [[해군성]]에서는 프랑스 항구들에 대한 봉쇄를 풀고 탈출한 빌뇌브 함대를 잡아 족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영국 함대들이 봉쇄를 풀고 사라지자 프랑스 함대는 항구에서 기어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넬슨의 실수 덕에 [[프랑스 해군]]은 전력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스페인 해군의 전력까지 흡수해 트라팔가르 해전 즈음에는 전열함만 33척 규모인 대함대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요구대로 영불 해협을 향해 항진하지는 않았다.[* 빌뇌브가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카디즈]](Cadiz) 항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했다.] 지휘관인 빌뇌브는 결전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이는 빌뇌브가 단순히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기를 거치면서 해군장교 및 숙련된 선원이 단두대 등으로 날아가 버려 프랑스 해군의 숙련도가 처참했기 때문이다. 빌뇌브 본인 자체가 아부키르 만 해전을 겪으면서 이런 현실을 뼈아프게 다시 한번 절감했으니 말이다.] 한편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격멸할 기회[* 로버트 칼더(Robert Calder) 제독이 지휘한 피니스테라 곶 해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소극적인 자세 탓에 실패했고 답답해진 영국 해군성은 넬슨을 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빌뇌브가 함대를 끌고 [[카디스]]에 틀어박히자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한 상륙 작전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 영불 해협은 영국에서 가장 거대한 [[함대]] 중 하나인 해협 함대(Channel Fleet)가 틀어막고 있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전함의 호위 없이 병력을 실은 수송선만으로 [[상륙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불로뉴의 군대를 오스트리아 전선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빌뇌브에게 지중해를 통해 [[나폴리]]로 항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빌뇌브가 움직이지 않자 분개해 프랑수아 로실리 제독을 빌뇌브의 후임으로 카디즈에 파견한다. 당황한 빌뇌브는 급히 카디즈를 출항했고 트라팔가르 곶에서 넬슨이 이끄는 27척 전열함 규모의 영국 함대와 마주치게 된다.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찔렀으나 전투 도중 [[프랑스 해군]] 전열함 [[르두터블]] 함의 마스트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전투가 끝나기 직전 사망했다. 현재도 보존되어 있는 [[HMS 빅토리]] 함에 넬슨 제독이 총에 맞은 장소가 표시되어 있는데, 위치는 후갑판의 타륜 앞부분이다. [[허파]]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힌 총탄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죽어갈 때 [[군의관]]에게 자신의 치료 대신 다른 부상자의 구호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남겼다고 한다. 관련 기록화에서는 갑판에 쓰러진 넬슨 주위에 여러 [[장교]]들이 모여서 임종을 지키는 모습을 묘사한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 넬슨은 부상을 입은 직후 곧바로 부하들이 하갑판의 부상자 수용실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당시 빅토리와 르두터블 사이의 교전이 워낙 치열해서[* 특히 빅토리는 르두터블의 돗대에서 쏟아지는 총알과 수류탄을 뒤집어쓰던 판국이라 상갑판 전투는 확실히 영국군이 밀리고 있었다.] 넬슨의 부하 장교들이 도저히 임종을 지킬 여유가 없었다. 유언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제 의무를 다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유언]]'.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 말 잘 받아 적었는가? 내가 뭐라고 했는가?"''', 또는 '''"내 할머니가 자네보단 키스를 잘하겠네"''' 둘 중 하나라고 한다. 실제로 저 공식적인 유언을 남긴 이후 넬슨 제독은 몇번이나 자신의 말을 받아 적었는지 확인했고 심지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도 깨어나서는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 운운한 건, 죽기 직전 빅토리의 함장 하디([[http://en.wikipedia.org/wiki/Sir_Thomas_Hardy,_1st_Baronet|Thomas Hardy]])[* 넬슨은 빅토리 함에 탑승하기는 했으나 함대의 총 지휘관인 '제독'이고 빅토리 함 자체를 책임지는 함장은 하디였다.]에게 키스해 달라고(작별인사를 뜻함) 한 다음 하디 함장이 키스하자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의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럼주]]에 담겨 7일 만에 영국에 도착했는데, 이 때 당시 럼주가 그의 피에 의해 붉게 물든 일화에서 따와 붉은색 럼주를 '블러디 럼'이라 부르게 된다. 참고로, 그 때 당시 그 럼주는 애도의 의미로 사람들이 나눠 마셨다든지, 선원들이 몰래 럼을 빼 마시느라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통 안에 럼주는 남아있지 않았고 시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다. 넬슨의 시신이 급행으로 [[런던]]까지 이동할 때 부패를 막으려 럼주에 담겨 보내진 건 맞다. 그러나 럼주만 넣은 게 아닌 장뇌와 좀약을 잔뜩 넣고, 거기에 관이 놓인 메인 마스트 밑에서 [[해병대]]원들이 경계 근무를 했다.[* 아무리 선원들이 거칠다고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독의 관까지 건들 정도로 영국 해군의 선원들이 막장이지는 않았다. 무슨 해적도 아니고... 심지어 그 해적들도 엄격한 규율과 질서로 유지되었다.[[해적#s-6|#]]] [[영국 해군]]의 전통적인 [[관례]] 중 하나가, 복무 중 사망한 [[사람]]의 시신은 본국으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장사를 지낸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한때 영국에게 점령당했던 [[거문도]]에 영국 [[수병]]의 묘가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전사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장하는 것이 원래 관례였지만 넬슨의 경우 유언 때문에 수장하지 않고 본국으로 시신을 옮겨 장사를 지냈다. 이는 영국 해군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에 해당한다. 넬슨의 장례식은 32명의 제독과 100명의 함장들, 1만명의 수병들이 참석했을 정도로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국가 영웅의 장례식이니 당연한 일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와 넬슨의 사망 소식을 모두 접한 당시 영국 국왕 윌리엄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크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가 안장된 곳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